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 독립전쟁 (문단 편집) === 번외: 아나톨리아 내 그리스계 튀르키예인들의 행보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군에는 튀르크인이나 아랍인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국적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등도 있었다. [[탄지마트]] 개혁 이후 실시된 근대적 [[징병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에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며 개중에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심지어 종전 이후 오스만 제국군이 해체될 때까지도 오스만군에 군적을 두고 있던 그리스계 장교 및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군이 이즈미르와 그 주변을 점거한 이후인 1920년 4월 29일에 내려진 그리스군 점령지 내 32세 미만의 모든 남성에 대한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그리스군의 징집령에 응해 그리스군으로 갈아탄 이들도 있었지만 전우와 총을 맞대고 싶지 않아서, 혹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군과 함께해 그리스군과 싸운 이들도 있었다.[* 당시 그리스군이 내린 징집령 도 종교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이나 [[유대인]], 무슬림까지 강제로 군대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맞서서 튀르키예 대국민의회측도 1920년 9월 13일에 볼루, 게이베, 에르투으룰, 에스키셰히르, 퀴타햐, [[아피욘카라히사르]], [[데니즐리]], 부르두르, [[으스파르타]] 도 내에 거주하던 20-40세 사이의 비무슬림 남성에 대해 예외 없이 비전선지역으로의 이주령을 내렸으며 대부분은 앙카라로 이주시켰다. 하지만 [[에스키셰히르]]와 빌레직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비무슬림들은 현지 무슬림 튀르크인들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고 그리스군에 참가하기 싫어서 그리스 점령지역에서 도망친 그리스계 주민들도 이쪽으로 많이 이주했기 때문에 이 두 지역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이주령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이에 관해 [[1921년]] [[8월 25일]]자 인민의 자유(Hâkimiyet-i Milliye) 신문에서는 "이즈미르의 룸인(그리스계 튀르키예인)들 사이에서 군대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 많은 룸인들이 [[네덜란드]] 영사관으로 가서 본인이 오스만 제국 국적임을 증언하고 군대징집을 면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또한 사카리야 전투 당시 포로로 잡힌 그리스군 제49보병연대 소속 병사는 본인을 포함한 연대병력 절대다수가 아나톨리아 룸인들이며 다들 탈영을 원했지만 15-20일만 버티면 된다는 지휘관의 말을 믿고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스계 튀르키예인과 튀르크계 튀르키예인 간의 인간적인 협력도 있어서 그리스군이 [[퀴타히아]]를 점령했을 때 현지의 룸인들은 튀르크인 이웃들을 보호하기 위해 튀르크인의 가게 간판에 즉석으로 [[그리스어]]를 써서 붙여 주었고 이렇게 해서 튀르크인들을 그리스군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기도 했다. 에디르네에서는 현지 룸인들이 튀르크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고 그리스군이 강제로 튀르크인 이웃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룸인들이 거부해서 그리스군으로부터 학살당하는 사건도 있었고 현재는 이스탄불에 속하는 차탈자 지역에서는 룸인들의 동네에 거주하던 파즐의 아들 요르기(Fazıl oğlu Yorgi)가 그리스군에 의해 체포되어 반죽음이 될 때까지 구타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이름인 파즐이 무슬림들이 붙이는 이름이라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아들 이름인 요르기는 그리스어로 하면 요르요스인데 그리스에서 가장 흔한 남성 이름이다. 그리스군의 철군 이후에도 튀르크인과 그리스인의 인간적인 우호관계에 대한 증언은 존재하는데 이즈미르 해방 이후 당시 이즈미르 도에 속한 베르가마에 거주하던 룸인인 아포스톨로스 미코니아티스는 "우리 지역에 거주하는 튀르크인 이웃들이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간들을 나귀에 싣고 항구로 가고 해방의 꿈을 가지고 배를 기다리고 있다."고 증언했으며 역시 이즈미르 근처의 우를라에 거주하던 니콜라오스 파파니콜라우는 전쟁중에 그리스군에 강제 징집되었고 그리스군이 이즈미르에서 철군할 때 남았는데 도중에 만난 튀르크인에게 안전하게 도망갈 길을 물을 때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증언했다. "튀르크인: 어디 마을 사람이오?" / "사자키 마을이오" / "어느 집안 사람이오?" / 파파니콜라우 가문인데요" / "조심하시오. 자네 아버지를 아니까 하는 말인데 산길로 해서 조용히 빠져나가시오."[* 이 문단 내 모든 증언, 기록들은 빌레직 셰이흐 에데발리 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타네르 빌긴(Yrd. Doç. Dr., Taner Bilgin)의 논문 <전쟁기간 동안의 아나톨리아 룸인들이 겪은 딜레마 ''{{{-1 Savaş Yıllarında Anadolu Rumlarının Yaşadığı İkilem(1919–1922)}}}''>에 근거했다.] 이러한 사실과 증언들을 통해서 당시의 본토 그리스인들과 아나톨리아의 룸인들은 서로 동족으로 여기고 그리스에 협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상 대대로 알고 지내던 무슬림 이웃들과의 평화과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이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이들을 서로 적으로 만들고 서로를 학살하게 만든 이 전쟁은 [[민족주의]]가 초래한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